오늘도 자판을 두드린다...
그때는 몰랐다.
이 선택이 28년 넘게 이어질 줄은….
내 연령대의 사람들은 다 겪었을 테지만,
우리 세대는 꽤나 엄격한 반일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배운 일본과 북한은 사람이 아니었다.
북한은 붉은 늑대로,
일본은 동그란 안경을 쓰고 일본 순사 제복을 입은 쥐로 그려져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왜곡된 반공과 반일의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컸다.
당시에 아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똘이장군이라는 애니메이션도 그랬다.
나쁜 무리들은 어김없이 붉은 늑대로 등장했고,
그 우두머리는 어찌나 큰지 거의 괴물 같은 돼지였다.
그게 김일성이 뚱뚱해서 그렇게 표현된 건지는 모르겠다.
어찌 됐든 인터넷도 없던 시절,
우리는 그런 상징과 이미지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우리 학교 제2외국어가 일본어로 정해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날 전교생이 수업을 거부하고 데모를 했다.
내가 다닌 학교는 대학 부속 고등학교였다.
툭하면 데모를 하던 대학생들의 영향을 그대로 받던 곳이었다.
일본 같은 나라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 자체가 수치라고 생각했었다.
일본어를 배우면 여학교와 미팅 소개도 잘 안 들어온다는 소문까지 돌았고,
나 역시 별 고민 없이 데모에 섞여 있었다.
그런데 웃기게도,
대학 입시에서 일본어가 너무 쉽게 나온다는 말에
우리는 또 너무 쉽게 설득당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학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철저한 반일 교육을 받고 자란 내가
해외 이주 국가로 일본을 떠올릴 이유는 전혀 없었다.
1990년대 초반, 한국은 본격적인 글로벌화가 시작되던 시기였다.
삼성, 금성, 현대, 대우 같은 대기업들이 해외로 나가기 시작했고
정부도 그 흐름을 적극적으로 밀어주던 때였다.
해외 연수도 잦았고,
여름 휴가에 해외 경험을 목적으로 여행을 간다고 하면
회사에서 일정 금액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출장을 가면 직급에 따라 ‘품위 유지비’라는 명목의 돈도 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참 다른 시대였다.
나는 주로 미국으로 출장을 갔다.
말로만 듣던 미국은 정말 크고, 정말 멋진 나라였다.
도로 하나를 만드는 데도
백 년 앞을 내다보고 설계한다는 말을
그때 처음 실감했다.
그렇게 미국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고,
‘이런 나라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씩 마음속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 출신 성분으로는 부장 이상 진급이 어렵다는 사실을.
임원이 되려면
서울대, 연대, 고대 같은 소위 명문대 출신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부터 차라리 마음을 굳혔다.
어차피 여기서 더 올라갈 수 없다면,
기회의 땅, 아메리칸 드림을 꿈꿀 수 있는
미국으로 가보자고!
그해 여름 휴가는 연차까지 끌어다 써서
2주 동안 워싱턴, 뉴욕, 시카고를 도는
동부 3대 도시 여행을 계획했다.
출장과 여행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출장 때는 늘 좋은 호텔에서 지냈으니까
미국의 진짜 생활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일부러 싼 호텔을 잡고,
음식도 로컬 식당이나 카페테리아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 여행에서 두 가지를 깨달았다.
하나는,
미국 국내선 승무원들은
내가 알던 ‘항공사 이미지’와 전혀 다르다는 것이었다.
한국 항공사 승무원들이 연예인 같다면,
미국 국내선 승무원들은 말 그대로
옆집 아주머니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 TWA 항공을 탔던 걸로 기억하는데,
통로를 지나다가 내 어깨에 몸이 부딪힐 정도로
체구가 큰 뚱뚱한 아주머니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분들이 너무 다정하고 친절해서
여행은 오히려 더 편안했다.
그리고 두 번째 깨달음.
나는 미국에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영어 때문도 아니었고,
아시아인이라서도 아니었다.
이유는 아주 사소했다.
나는 고기를 잘 못 먹었다.
소고기를 바짝 익힌 건 조금 먹었지만,
돼지고기는 거의 입에도 대지 못했다.
특유의 냄새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출장 때는 좋은 레스토랑만 다녔으니 몰랐는데,
로컬 식당엔 고기 음식이 너무 많았다.
한번은 호텔 옆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주문했는데,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가 들어 있었다.
그 순간 속으로 소리쳤다.
‘이걸 사람한테 먹으라고 주는 건가…’
결국 남은 여행 내내
홈리스에게 1달러를 주고
베트남 식당이나 중국 식당을 소개받아 끼니를 해결했다.
일본 식당은 가격이 너무 비싸서 엄두도 못 냈다.
결국, 음식이라는 아주 사소한 이유로
미국 이민 사전 답사는 그렇게 끝났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게 웃기다.
한번 이민을 마음먹고 나니
회사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미 미국은 포기했는데,
미련은 자꾸 남았다.
어느 일요일이었다.
집에 달아둔 커다란 파라볼릭 안테나로
NHK 방송을 보게 됐다.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스모 경기가 나왔다.
정제된 동작, 예절을 중시하는 분위기,
왠지 모르게 질서 정연한 느낌.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한 선진국인데…
한국이랑 가깝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고,
음식도 비슷하지 않을까?’
‘같은 아시아인인데
미국 같은 인종차별 문제도 덜하지 않을까?’
그때는 인터넷도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일본 생활에 대한 정보는
사실상 구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전혀 관심 없던 일본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그해 여름,
회사 선배와 함께
도쿄로 일주일간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 여행이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될 줄은
그때는 정말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