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발자인 이유.
코비드가 한창일 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개발자 전환을 꿈꿨지만 요즘은 좀 뜸해졌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개발자를 자신의 첫 커리어로, 혹은 하던 일을 관두고 개발자로 전환하는걸 목표로 합니다. 이 글은 그런 분들이 참고해볼만한 왜 개발자인가?에 대한 제 지극히 개인적이고 현실적인 답변입니다.
참고로 이 글에는 “왜”만 존재하고 “어떻게”는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했었는지 대한 글은 몇차례 쓴 적이 있기도 하고, 그때와 지금의 상황이 다르고 제 상황과 다른 분들의 상황은 다르기 떄문에 일괄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네요.
또한 쉽고 빠르게 날먹할 수 있다는 얘기도 당연히 아닙니다. 듣기 좋은 위로 같은건 없어요.
12년차 게임기획자를 포기하고 커리어를 바꾸기로 하면서 저는 "무조건 개발자가 되겠어" 같은 열정으로 직업을 선택한게 아니라 철저하게 소거법으로 현실적으로 할 수 없을만한 일을 걸러내는 작업을 거쳤습니다.
그때 필터링 조건으로 삼은건 다음과 같습니다.
핵심 조건:
하방이 낮을 것: 망해도 먹고 살만큼 벌어야 함
수요가 많을 것: 일자리가 꾸준히 있어야 함
학부 교육으로 취업 가능: 대학원이나 고시급 공부를 요구하지 않을 것
부가 조건:
과도하게 높은 커뮤니케이션 수준을 요구하지 않을 것
평판/인맥 의존도가 낮고 내 기술로 먹고 살 수 있을 것
육체노동이 아닐 것
나라별 문화와 관계없이 취업 가능.
이 모든 조건을 &&로 충족하는건 예나 지금이나 개발자밖에 없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하방은 낮고 상방은 높다는 겁니다.
이 하방이 낮다는 말을 국비 6개월과 같은 뜻으로 받으면 안되는게, 예전 코로나 시절에도 국비 6개월해서 네카라쿠배 가는건 정말 가뭄에 콩나듯 재능과 노력, 운을 겸비한 사람이나 가능했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건 기회의 공정성이라는 측면이에요.
국비교육을 배제하고 제대로 전공자가 되어 취업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교육의 수준은 학부 레벨, 최대 140학점 수준에서 끝납니다. 거기에 특정 도메인을 더 파고 들어갈 필요 없이 제너럴한 개발자가 되기 위해서 배워야 하는 과목이 적습니다. 단적으로 컴싸 이전 2차 산업을 대표하는 전기전자공학 / 화학공학 / 기계공학의 경우 필수적으로 익혀야 할 전공 과목의 수와 기초 과학, 즉 수학, 물리, 화학 등의 깊이가 다릅니다.
컴싸 전공생은 물리, 화학 등의 기초 과학은 아예 중학교 수준이어도 취업해서 일하는데 아무 상관이 없고, 수학 역시도 게임 제작이나 그래픽스 등의 특정 분야가 아니면 미적분 정도면 충분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컴싸 전공 과목 중 70학점도 많고 2학년까지의 전공필수+3학년 일부 과목만 들어도 충분하다고 봐요.
전공 과목에 대해 좀더 얘기하면 프로그래밍, 이산수학, OOP,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초급/중급 알고리즘 및 데이터 구조, 컴퓨터 구조, OS 정도를 익히고 거기에 추가로 도메인에 따라 DB, 네트워크, 분산처리, 인공지능 등을 더 배우면 됩니다. 과목 수로 치면 많아봐야 10-12과목 정도? 수치해석, 컴퓨터 그래픽스, 고급 알고리즘, 머신러닝은 해당 분야 일 안할거면 안 건드려도 먹고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죠. 그나마도 공짜로 공부할 수 있는 교육자료가 널려있고, 실습을 위해 비싼 돈과 실험실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여기에 비교 가능한 직업군이 뭐가 있을까요? 국비교육받고 나와서 개발자 힘들다 박봉이다 그러는데 국비교육은 애당초 다른 4년제와 비교할게 아니라 다른 국비교육, 즉 영상 편집, 제과제빵, 요양보호사와 비교해야 합니다. 이들 다른 국비교육 관련 직업에 비해 개발자가 더 힘들고 박봉일까요? 그러면 국비교육을 검색했을 때 개발 관련 교육만 나오는 이유는 뭘까요?
업계 최상급 수준의 회사를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학업량은 그게 FAANG이던, 네카라쿠배던 관계없이 학부 수준이면 충분합니다. 그걸 얼마나 열심히 해야할지는 별개의 이야기이고, 또한 거기에 필요한 노력, 시간, 적성이 별게 아니라는건 결코 아니지만 개발자는 대학원을 필수로 가야하는 것도 아니고 고시/공시/자격증을 통과하기 위해 몇년씩 투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개발자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가 이겁니다. 저는 "내가 재능이 쩔어서 공부 조금만 하면 구글 씹어먹고 들어간다"는 이유로 시작한게 아니라 “재능이 없어서 개발자로 대성하지 못한다 해도 이 개발이라는 기술만 배워둔다면 어디가서 굶어죽진 않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습니다. 단적으로 컴싸 개론에서 가르치는 if문, for문만 돌릴 줄 알아도 엑셀 VBA등으로 웬만한 매크로 짤 수 있고, 많은 분들이 이를 간과하는데 이게 개발자 커리어의 가장 큰 안전장치입니다.
물론 엔트리 시장이 레드오션이긴 합니다. 하지만 지금이 코비드 이전의 시장보다 더 어려울까요? 딱히 그렇지 않습니다. 코비드가 한창이던 22년 초에 비하면 최악으로 보이겠지만 18-19년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없고 23년과 비교하면 지금은 훨씬 사정이 나아졌죠.
또 혹자는 개발자가 평생 공부해야 한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보일러 대리점하셨던 제 아버지도 연탄부터 화목, 가스, 기름, 전기까지 새로운 보일러 나올때마다 뜯어서 공부하셨고 저 역시도 10년 넘게 기획자 하면서 매번 프로젝트 할때마다 RPG, SRPG, RTS, 액션, 스포츠, SNG, 퍼즐 등 단 한번도 같은 장르를 만들어본 적이 없으며, 했던 일들도 UI, 시나리오, 데이터, 밸런스, 시스템 기획 등 매번 달랐습니다. 당연히 그때마다 모든걸 처음부터 새롭게 배워야 했구요.

윗 짤은 작고 귀여웠던 20년 전의 제 초봉입니다. 한때 여기 오키에서 8년차 연봉 얼마 어쩌구 하는 어그로글 돌기도 했었는데 저는 한국에서 커리어 끝낼때까지 연봉 5천도 못 넘겨봤어요. 지금요? 더이상 돈 걱정 안하고 살아도 될만큼 법니다.
저는 고졸이되 고등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고, 대졸이지만 사이버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서른이 되어서야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물론 저는 운이 크게 따랐고 노력도 했고 나름 적성에도 잘 맞아서 좋은 회사에 취업했지만 빅테크를 못 갔어도 충분히 좋은 회사에서 돈 걱정 안하고 잘 살았을겁니다.
저는 제 집안에서 처음으로 대학교를 간 세대, 해외에서 소위 말하는 1st gen college student였고 월급 100만원 받던 시절부터 내돈내산으로 일해왔고, 역시 내돈내산으로 해외 유학가서 커리어 전환까지 했습니다. 개발자가 가진 개방성은 다른 직업들은 비교 불가능한 수준이에요. 어떤 직업이 저 같은 배경의, 즉 고졸, 사이버대, 비전공자, 30대의 커리어 체인저에게 기회를 줬을까요? 이게 제가 개발자를 선택한 이유였고, 여전히 개발자가 개꿀이라 믿는 이유입니다.
다시한번 얘기하지만 개발자가 개꿀이라는게 쉽다는 뜻으로 얘기하는건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가진 것 없는 자가 노력했을 때 가장 확실한 리턴을 줄 수 있는 직업은 개발자밖에 없다고 믿습니다.
이걸 여기까지 읽고도 여전히 이 모든게 저라는 아웃라이어의 쩌는 재능으로 이뤄낸거고 여전히 개발자는 그런 직업이 아니라 생각한다면 이 모든 과정, 커리어 전환, 대학 입학부터 취업까지는 저 혼자 한게 아니라 제 와이프와 함께 했다는 점을 얘기하고 싶네요. 저와 똑같이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수학도 영어도 못해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해서 졸업후 한국에서 마케터/전략기획으로 일했습니다. 지금 마이크로소프트 Teams에서 개발자로 일하고 있구요.
연말에 한국 들어가서 그동안의 여정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있으니 와서 들어보시는 걸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