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회화는 끝났다"
1839년 프랑스 화가 플 들라로슈(Paul Delaroche)가 최초의 사진을 보고 한 말입니다.
From today, painting is dead.다게레오 타입(Daguerreotype)
1893년 최초의 사진 제작 기법인 다게레오타입이 고안됩니다.
이 기법으로 찍힌 사진을 본 폴 들라로슈는 회화가 사진과 경쟁할 수 없을 것이라 직감합니다.
이 외에도 당대의 수많은 화가들이 몇 분만에 풍경이 찍혀 나오는 놀라운 광경을 보며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격렬하게 반응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고전주의
수백 년 간 피사체를 그리는 일은 화가들의 몫이었습니다.
왕이나 귀족, 성직자와 같은 기득권자들이 많은 돈을 주고 화가를 고용, 작업 의뢰를 맡기면 짦으면 2개월 길게는 1년 넘게 그림을 그려서 납품해왔습니다.
본인의 자화상, 성경 속 구절, 영웅의 활약, 또는 신화 속 이야기 등 기득권층의 취향과 상상력을 대신 실현시켜주는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당대의 화가들은 피사체를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중요했습니다.(이를 고전주의와 신고전주의라고 부릅니다. 나도 미알못이라 잘 모름.)
사람들이 눈 앞에 펼쳐진 스냅샷을 보고 머릿 속에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도록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인상주의, 초현실주의
단 몇 분간만 렌즈를 노출시키면 순식간에 풍경이 그려져 나오는 광경을 보자, 화가들은 놀라움을 넘어서 경악스런 반응을 보입니다.
든든한 후원자였던 왕과 귀족들도 이 신묘한 기술에 관심을 보이며 너도 나도 사진을 찍기 시작합니다.
화가들에게는 많은 돈을 받고 몇 개월간 그림을 그리는 일 자체가 사라질 위기가 닥칩니다.
그래서 화가들은 직업을 때려쳤을까요?
여기서 역발상을 하게 됩니다.
사진이 못 찍는 그림을 그리자오히려 사진으로부터 영감을 받아서 새로운 화풍을 시도합니다.
이는 사진이 가져온 사회적 변화가 다시 화가들을 자극하고 영향을 미친 결과입니다.
당시 기술이 조악해서 흑백의 뿌연 사진이 대부분이었음
사진의 대중화으로 가격이 하락하며 일반인들도 사진을 찍기 시작함
그 전에는 감히 자기 모습을 남길 수 없었던 일반인들도 싼 값에 너도 나도 사진을 찍었는데, 귀족들의 권위적이고 영웅스러운 모습을 그리던 화가들에게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게 됩니다.
그림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찍은 수많은 사진들, 특유의 조악한 사진의 질감이 오히려 당시 화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줍니다.
이것이 인상주의라는 화풍으로 발전합니다.
AI 때문에 조만간 개발자가 사라질 거라는 나이브한 예상과 달리 무언가가 없어지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보다 더 극적인 역사적 사실은 인쇄술입니다.
제가 볼 때는 인쇄술이야 말로 개발자들의 미래를 잘 보여주는 사례같습니다.
Scribe(서기관)
고대부터 문자를 읽고 해석하고 번역하는 일은 일부 엘리트 집단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인간이 점토에 문자를 기록할 때부터 문자 기록을 담당하는 집단이 존재해왔고, 현재까지 남아있는 수많은 고전들은 모두 서기관(또는 필경사) 집단이 한땀 한땀 글자를 새겨 넣은 것들입니다.
그만큼 이들의 희소가치는 컸고, 당연히 이들을 고용할 수 있는 사람은 왕이나, 귀족, 또는 수도원에 국한됐습니다.
이들은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기본적으로 했고 때에 따라서는 고대 아랍어를 다루기도 했으니 왕의 칙령이나 계약서같은 공문서 또는 고전을 해석하고 성경을 필사하는 등 문서 작성의 모든 과정을 담당했습니다.
활판 인쇄
이러한 이들의 지위에 큰 타격을 입힌게 구텐베르크가 발명했다고 알려진 활판 인쇄술입니다.
아래와 같이 생긴 활자(movable type)를 미리 만들어서 조판에 하나하나 끼워넣고 고정시킨 후 잉크를 발라서 종이에 찍어냅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File:Metal_movable_type.jpg
이러한 활판 인쇄 전에 서기관들이 어떻게 책을 만들었는지 잘 보여주는 블로그가 있습니다.
중세필사실 - https://brunch.co.kr/@touvoyage/91
책을 만드는 일은 장기적으로 열과 성을 다해야 하는 작업... 양피지를 만드는 일...
깃털이나 갈대, 뾰족한 철필, 글자를 지우는 데 사용하는 작은 칼, 속돌 등과 같은 도구
양피지에다가 오랜 시간 동안 한 자 한 자 글자를 적어
필경사들이 매달려도 성경책 하나 베껴 쓰는데 몇 년이 걸렸으나 활판 인쇄술은 서기관들에게 소요되던 돈과 시간을 비약적으로 줄였습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하루 아침에 직장과 엘리트라는 신분을 잃었을까요?
장기적으로는 지위가 하락했으나 혁명적인 변화에 적응해서 나름대로 새로운 직업으로 옮겼습니다.
인쇄소에서 글자를 교정하고 글맵씨를 손봐주는 일을 하거나, 직접 조판 작업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활자로 문서를 찍어낸다고 해도 여전히 글간격과 줄간격을 손보는 작업을 필요했습니다.
라이노타입(Linotype), 기계식 조판 시대
14세기에 나온 활판 인쇄술은 1800년 말까지 큰 변화없이 그런대로 유지, 발전됩니다.
그러다 산업혁명 이후 기계 제작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면서 또 한 번 혁신적 도약을 합니다.
1884년에 주조, 문선, 조판을 한 방에 처리하는 라이노타입이라는 기계가 나옵니다.
주조 - 납을 부어서 애기 손톱만한 활자를 만듦
문선 - 활자를 찾아서 배열함
조판 - 문선된 활자 묶음을 조판에 고정시킴. 글자 간격 줄 간격 등 보기좋게 잡아 줘야 함.
아래 영상에서 키보드로 글자를 치면 납물을 부어서 활자에 맞게 글자를 하나의 줄로 주조해서 문선 작업까지 끝마칩니다.
저 기계가 1970년도까지 사용돼서 아직도 경험자들이 많습니다.
예전에는 복사할 문서를 들고 문선공이 글자마다 활자를 하나하나 찾아서 배열하고 조판공이 활자를 조판에 고정시키는 지루한 과정을 거쳤으나, 라이노타입을 도입한 후 또 한번 획기적인 생산성 향상을 이룹니다.
이제 문선공, 조판공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대량 실직했을 것 같지만 새로운 환경에 맞춰서 자신의 직업 기술을 바꿔 나갑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기계가 작업 절차를 단순화했지만 여전히 기계를 조작하고 고치는 등의 새로운 직업이 필요해졌고 문선공, 조판공 시절의 경험이 여전히 새로운 직종에서도 유효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미국의 인쇄 출판 노조인데, 기계식 조판이 활성화됐어도 노조는 규모를 유지하며 지속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1970년도부터 인쇄술 노동자들의 숨통을 끊는 변화가 조용히 찾아옵니다.
오프셋 인쇄, 컴퓨터
기존의 활판 인쇄 대신 잉크와 물을 이용해서 매니큐어 바르듯이 찍어내는 새로운 인쇄술이(오프셋 인쇄) 발명됩니다.
이 때부터 문선이나 조판같은 전통적인 기술들이 쓸모없어지기 시작합니다.
결정타는 1980년도 도입된 매킨토시와 포스트스크립트인데 인쇄술이 디지털 기반으로 전환되면서 활판 인쇄는 물론이고 인쇄에 사용되는 필름 제작 과정까지 모두 퇴출시킵니다.
이후 활판 인쇄는 문화 유산 차원에서 국가의 지원 속에서 나름의 가치를 찾아가고 있습니다(물론 산업적 가치는 거의 없음)
Copilot, Gemini, Chatgpt
그렇다면 지금의 AI 코딩 보조 도구는 어디쯤 해당할까요?
제가 볼 때는 라이노타입 정도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14세기 활판 인쇄가 서기관을 대체하고, 1980년도 컴퓨터가 활판 인쇄를 퇴출시킨 수준은 아니라는 거.
이 두가지 사례를 보면 변화의 시작이 철저히 레거시 밖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레거시 산업 종사자들은 그러한 변화가 진행되는 줄도 몰랐고, 새로운 기술을 발명한 주체들 역시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몰랐습니다.
인간이란게 시간이 남으면 자꾸 쓸데없는 짓을 하고, 그 중에 뭔가가 얻어 걸려서 역사적으로 큰 사건으로 발전합니다.
개발자의 미래
현재로서는 AI 보조 도구를 통해서 생산성 증가를 도모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코드를 짜는 행위를 반자동화하는 단계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개발자가 설계를 잘 해줘야 하고, 코드를 자동으로 뽑아낼 때 환각을 없애가 위해서 주석을 잘 달아줘야 합니다.
질문을 개떡같이 하면 코드도 개떡같이 나옴
개떡같은 코드를 그냥 커밋하면 나중에 발목이 잡힘
AI 코딩 도구가 기술 부채의 주범이 될 수도 있음
이렇게 해서 AI가 사람 대신 코드를 뽑아주고, 개발자는 남는 시간에 테스트를 붙이고 설계를 가다듬는 고도화 작업에 전념하게 될 것으로 추측합니다.
14세기에 활판 인쇄가 대세가 되자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당시 사람들이 책을 예쁘게 꾸미는 일에 노동력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활판 인쇄 전에 유럽에 5만권의 책이 있었는데 활판 인쇄 도입 후 900만 권으로 폭증할 정도로 생산량이 넘치자, 시장에서 책을 더 많이 팔기 위해서 조판에 무늬를 새겨넣기 시작합니다.
양장본이 나오고 표지에 알록달록 무늬를 넣고 책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삽화가 들어갑니다.
이렇게 생산 능력이 향상되면 레거시 노동자가 줄고 임금이 줄어들 것 같지만 어떤 식으로든 제품을 고도화하는 또다른 노동 수요가 증가합니다.
개발자 대체 조건
개발자가 없어지려면 아마도 아래와 같은 일이 벌어져야 할 겁니다.
컴퓨터과학의 범주 바깥에서 완전히 새로운 기술이 나와야 함
코딩하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해져야 함. 기계가 대신 짤 필요조차 없어져야 함
개발 경험이 새로운 기술에서 완전히 쓸모없어져야 함
물론 이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지금 그런 기술이 만들어지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걸 만드는 누군가도 자기가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모를 겁니다(뭘 하든... 하지 마라..).
컴퓨터는 2차세계대전 때 독일군 암호를 해독하려고 만들었습니다. 이게 50년 후에 인쇄술을 박살낼 줄 누가 알았겠나요?
함부로 미래가 어떠느니 얘기하는게 부질없고, 그런 얘기는 재미로만 소비하면 됩니다.